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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석탄산업사 - 한국

고문헌 속의 석탄

석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 315년 그리스 문헌에 나타나 있는데, “북부 이탈리아의 소그리아 지방과 북부 그리스의 에리스에서 석탄(목탄과 흡사한 물질)을 대장간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데오프라스터스의 논문)고 기록되어 있다. 동양의 경우, AD 3세기경 중국(삼국시대)의 수경(水經)이라는 책에 석탄이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사기와 1590년 평양관찰사 윤두수가 편찬한 “평양지”에 석탄에 대한 기록이 있고, 1730년 윤유의 “속평양지”에도 석탄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속평양지(續平壤誌, 尹游, 1730년)

府東三十里彌勒峴有黑土, 許都事灌曰,“此乃石炭也. 吾東方不知用石炭, 可歎. 若當守城之時, 則城中柴草甚艱. 余考證古聞, 造石炭小如一甓, 足炊一朝之食, 其法, 掘黑土, 合黃土, 和水成泥, 暴乾用之. 北京以石炭, 築成天壇, 欲待城守時用也.” 평양부 동쪽 삼십리의 미륵현에 검은흙이 있는데, 도사(都事) 허관(許灌)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석탄이다. 우리나라는 석탄을 사용할 줄 모르니 한탄스럽다. 만약 성을 지키는 때를 당한다면, 성 중에 땔감이 심히 어렵다. 내가 옛날에 들은 것을 고증해 보니, 석탄을 벽돌처럼 작게 만들면 아침 밥을 취사하기에 충분한데, 그 방법은 검은흙을 캐어 황토와 합하고, 물을 섞어서 진흙을 만들어 햇빛에 말려서 사용한다. 북경에는 석탄으로 천단(天壇)을 만들어서 성을 지킬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근대적 석탄개발은 1896년 니시첸스키가 함경도 경성과 경원지방의 석탄채굴권을 획득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실제로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03년 궁내부 내장경 이용익과 프랑스 용동상회가 합동개발계약을 체결한 평양사동탄광이 최초였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1915년 12월에 조선광업령을 제정하였고, 1916년 조선광업령시행규칙과 조선광업등록규칙을 제정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서 자원수탈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번지고 마침내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석탄의 수요는 증가하였고, 이에 일본은 탄광개발을 더욱 확대하였다. 아오지탄광의 개발을 확대하고 남한지역 탄광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문경탄광을 비롯한 화순, 은성, 영월, 삼척 등의 탄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일제강점기 관련 사진
좌측상단 : 삼척개발주식회사 기술양성소 사진 1, 좌측하단 : 삼척개발주식회사 기술양성소 사진 2, 우측 : 삼척개발주식회사 기술양성소 사진 3문경경찰서 가은지서 단체사진좌측상단 일제강점기 사진 1, 좌측하단 일제강점기 사진 2, 중앙/우측 : 일제강점기 은성탄광 직원 단체사진좌측 : 일제강점기 은성광업소 사진 1, 우측 : 일제강점기 은성광업소 사진 2
해방이후 ~ 석탄의 자급자족

해방 이후 당시 탄광에 남아 있던 조선사람들을 중심으로 자치운영회가 조직되었다. 1945년 7월 남한은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일본인 재산은 모두 조선군정청 소유로 전환되면서 탄광 역시 군정청으로 모두 귀속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석탄증산을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950년 11월 1일에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한석탄공사'를 발족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정부에서는 석탄운반의 가장 시급한 문제인 철도공사를 시작하였다.(1955년 영암선, 함백선 개통, 1955년 문경선 개통, 1956년 영월선 개통) 1961년 군사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석탄증산을 위해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1961년 12월 "석탄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이러한 석탄증산노력은 1966년에 1161만톤을 생산함으로써 석탄의 자급자족을 거의 실현하였다. 특히 산림녹화 5개년계획으로 인해 가정용연료가 석탄으로 대체되어 민수용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석탄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해방이후 ~ 석탄의 자급자족 관련 사진
좌측 상단 : 1969년 문경선철도 개통식, 좌측 하단 : 불정역, 우측 : 은성역군지원 1950년대좌측 상단 : 문경선 개통 1950년대, 좌측 하단 : 파독광부, 중앙 : 대한석탄공사 사옥 1950년대, 우측 : 영암선 개통은성탄광병원
주유종탄의 시대

1966년 10월 연탄파동을 계기로 꾸준히 성장했던 석탄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965년 가을부터 소비지 저탄량보다 연탄수요가 높아져 연탄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1966년 여름에는 연탄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연탄 수요가 급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66년에는 한파가 일찍 닥치는 바람에 연탄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그 결과 소비지 저탄량은 바닥이 되어, 서울에서도 연탄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연탄파동이 발생하자 정부는 에너지정책을 석탄위주에서 유류위주(주유종탄)로 전환하였다. ‘주유종탄’ 정책으로 인해 석탄산업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정부에서는 석탄산업 합리화 논의가 시작되었다.

주유종탄의 시대 관련 사진
좌측 상단 : 연료 현대화전시 사진, 좌측 하단 : 연탄 파동직후 석탄홍보 사진, 우측 연탄 파동직후 유류대체 사진황지본선 개통 사진
주탄종유의 시대

연탄파동을 계기로 하여 쇠퇴의 길을 걸었던 석탄산업은 1973년과 1978년에 발생한 석유파동으로 인해 다시 호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된 후 OPEC 가입국들은 친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압력의 수단으로 석유를 이용하였다. OPEC 가입국들은 석유의 생산량은 줄이고 석유의 가격은 인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인해 우리나라는 석탄 증산에 다시 박차를 가하였고,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석탄산업은 다시 호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의 호황은 연탄파동 전의 호황보다 더 좋아 재고탄은 순식간에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석탄을 생산하기도 전에 이미 다 예약이 되는 현상이 발생되었다. 석유파동 이후 정부는 에너지 정책을 유류위주에서 석탄위주(주탄종유)로 전환하였다.

주탄종유의 시대 관련 사진
좌측상단 : 연탄파동 이후 주유종탄정책 사진 1, 좌측하단 : 연탄파동이후 우류를 사기 위하여 줄을 서 있음, 우측 : 연탄파동 이후 주유종탄정책 사진 2
폐광

198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국제 유가가 안정되고, 국민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청정에너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져 가정용 연료로 가스가 보급되었다. 가스의 보급으로 인해 연탄의 사용량은 크게 줄어들었고, 무연탄의 소비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1987년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을 설립하였고,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모두 334개의 탄광을 폐광시킴으로써 석탄산업은 찬란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폐광 관련 사진
좌측상단 : 은성광업소 폐광 송별회, 좌측하단 : 폐광된 탄광 사진 1, 우측 : 폐광 이후 입구가 폐쇄된 갱구좌측 : 폐광된 탄광 사진 2, 우측 : 폐광된 탄광 사진 3좌측 : 폐광된 은성광업소 현 석탄박물관 갱도전시장 입구, 우측 상단 : 폐광 후 부지정리, 우측하단 : 폐광된 그 자리에 박물관 건립

한국의 석탄생산과정

  • 探炭 지하의 탄층부존 상태를 파악하고 부존위치, 형태, 매장량 및 열량 등을 확인하는 작업 지질조사, 물리탐사, 시추탐사 등
  • 開坑 지표에서부터 탄층까지 도달하는 통로를 개설하는 작업
  • 掘進 지하에 사람이 통행하거나 자재, 석탄 등을 운반하고 통기 및 지하수를 배수하기 위한 통로를 구축하는 작업
  • 採炭 탄층으로부터 석탄을 절취하거나 붕괴시키는 것 부존상태나 성상에 따라 괴탄 또는 분탄으로 채굴
  • 運搬 채굴된 석탄을 갱도 밖으로 반출하는 작업
  • 選炭 갱도 밖으로 반출된 석탄에서 암석, 이물질 등을 제거하면서 크기와 형태 및 탄질별로 분류하는 작업
  • 出荷 전국 각지의 수요처(연탄공장, 발전소)에 철도, 선박, 차량 등으로 수송하 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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